세번 영화화된 '솔라리스':
살아있는 행성, 인간 한계를 묻다

2024.11.25 14:23:33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의 'SF대작 읽기'=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

※이 글을 쓴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이다. 우주시대의 씨앗을 일찌감치 뿌려온 SF대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함으로써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이 코너를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지난 칼럼에서는 인간성과 기억의 본질을 탐구한 필립 K. 딕의 작품을 음미해 보았다. 그러고나니 이 주제에 대해 한층 더 깊이 탐구한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졌다. 인간의 의식, 기억, 그리고 현실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걸작이 있다. 1968년, 1972년, 2002년 자그마치 3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1961)다.

 

 

소설 <솔라리스> : 행성 솔라리스의 바다는 살아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는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이 신비로운 행성 솔라리스의 궤도를 도는 연구 기지로 파견되어 겪게 되는 이야기다.

 

솔라리스는 다른 행성과 달리 거대한 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거대한 바다로 뒤덮여 있으며, 이 바다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지적 생명체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많은 지성들이 솔라리스의 바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마치 인류의 지적탐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관찰, 가설 검증, 의사소통과 같은 전통적인 과학의 방법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완벽하게 무력했다.

 

스토리는 켈빈이 팀원들의 심리 상태와 기지의 작동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연구 기지에 도착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도착한 그는 동료들이 알 수 없는 이상한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곧 켈빈은 솔라리스의 바다가 기지 사람들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물질화시켜 그들의 정신에 깊이 억눌린 기억을 현실에 투사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연구진들은 이러한 존재를 '방문자'라 부른다. 켈빈은 오래전 생을 마감한 부인 하레이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이 존재는 켈빈의 기억 속 모습과 성격을 어느 정도 띄고 있지만, 그의 기억에서 비롯된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그 사람에게 달라붙어 절대 떨어지려하지 않고,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나타난다.

 

처음에는 공포에 휩싸인 켈빈, 몇 번이고 이 존재를 ‘보내버리려’ 애쓰지만 점차 너무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을 한 솔라리스의 창조물인 하레이와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편 하레이는 자기 존재의 이상함을 인식하면서도 점차 자아와 독립적인 의식을 갖추기 시작하며, 단순한 기억을 넘어 독립된 존재로 발전해나가는데…

 

“그녀가 물질적인 존재이며, 생리학과 물리학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우리의 감정에 깃든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도 그 법칙들에 대항할 수는 없다. 그저 그 법칙들을 혐오하는 게 고작이다. 연인들과 시인들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영원히 신봉한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문구 'finis vitae, sed non amoris(삶은 끝나도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러한 거짓은 헛되고 쓸모없지만, 그렇다고 우습지는 않다.”

 

이상한 행성 솔라리스의 바다는 인간을 현혹하는 비밀을 담고 있다. / imdb.com

 

<솔라리스>의 독창성 : 인간을 뛰어넘는 외계 지성체

 

<솔라리스>가 다른 SF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기술이나 어드벤처보다는 철학적, 실존적 측면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외계 지성체와의 접촉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SF 작품들은 외계 생명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상호작용이 어느 정도 가능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뛰어넘는 외계 지성체를 선보이며 인간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또 작품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솔라리스학'이라는 솔라리스에 대한 학문적 탐구 그 자체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솔라리스 탐구의 역사부터 이에 대한 학계의 진실탐구와 무관한 알력다툼과 학문의 진화 과정까지.

 

이를 통해 작가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은 결국 ‘인간 중심적’ 과학이리라. 학자들은 ‘지성을 가진 생명체라면 무릇 이러할 것이다’라는 가정들을 숱하게 세워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솔라리스의 반응 앞에서 모든 가정은 무력화된다. 솔라리스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 무관심하게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이는 모든 지적 생명체가 인간이 친숙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것이라는 인간 중심적 가정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휴머니스트인 동시에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므로 이렇게 말한다네. 우리는 다른 행성에 사는 종족을 정복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지구의 문화를 그들에게 전파하고 그들의 유산과 교환하고 싶을 뿐이라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신성한 교류의 기사’라고 여기지. 이것 또한 거짓일세. 우리는 인간 말고는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아. 다른 세계는 필요치 않은 거지.”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주인공이 자신이 미쳤는지, 즉 이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상상이 만들어낸 착란인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자신을 테스트하는 대목이다.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독자들의 머리를 파고드는 의문이다. 주인공은 지극히 데카르트적인 이 테스트를 스스로 '결정적 실험(Experimentum Crucis)'이라 칭한다.

 

참고로 결정적 실험은 두 개의 경쟁 가설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기 위해 설계된 실험을 의미한다. 한 이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증거를 제공하면서 다른 이론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여 과학적 이해에 있어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해주는 실험이다. 이러한 개념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처음 제안했으며 이후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확장된 바 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빛의 본질이 백색광이라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반박한 뉴턴의 프리즘 실험이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판명할 것인가? 다른 인물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조차 현실 속의 실체가 아닐 수 있으므로. 약물요법은? 약의 효능과 복용 후 결과를 아는 자신이 이를 시행하게 되면 이미 내가 알고있는 약의 효과까지 고려한 이중적 환상이 생성될 것이므로 역시 의미가 없다.

 

그래서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인가? 솔라리스 궤도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에게 신호를 보내 특정 시간 동안의 자오선 위치를 계산해달라고 요청한다. 소수점 이하 다섯 자리까지. 그리고는 그 결과값을 출력하여 보지않고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자신이 천체도와 인공위성 경로 운행표 및 기타 참고서적을 활용하여 스스로 이를 계산해본다. 물론 방정식을 세우는 것까지를 스스로 하고 실제 계산은 정거장의 계산기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위성이 보내온 수치와 미세하게만 다르다면 이것은 현실일 것이다(솔라리스의 바다의 복잡한 작용으로 인해 인공위성의 수치와 계산값이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다). 만약 인공위성을 통해 입수한 수치가 자신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면 직접 계산해낸 값과 비슷할 가능성은 없다. 정상상태가 아닌 뇌가 혼자서 복잡한 계산값을 상상으로 맞춰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 기막힌 실험이 아닐 수 없다. 심리학을 전공하였더라도 물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사랑하는 아내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럴 때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 imdb.com

 

학문은 빼고, 사랑은 더한 영화 <솔라리스> 

 

소설 <솔라리스>는 세 차례 영화화됐다. 1968년에 소련 중앙방송국에서 제작한 TV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감독한 1972년 영화,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조지 클루니 주연의 2002년 할리우드 리메이크. 뒤의 두 작품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며 각각 원작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미했다.

 

다만 두 영화 모두 원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위에서 본 학문적 고찰은 거의 배제했다. 영상화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으므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아쉽기 그지없다.  

 

1972년 타르코프스키 작품은 원작에 어느 정도 충실한 편이지만 인간과 감정적인 측면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주인공 켈빈의 복잡한 심리와 내면의 성찰을 깊게 파헤치며, 하레이와의 관계를 통해 개인적 여정을 탐구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느리고 사색적인 리듬을 통해 상실과 구원의 주제를 강조하며, 솔라리스의 미스테리는 그대로 남겨두고 이 세계가 인간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집중한다.

 

2002년 소더버그의 작품은 줄거리를 더 단순화하여 주인공과 하레이의 로맨스를 강조한다.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주인공이 그의 아내의 죽음을 경험하고, 솔라리스에 도착하여 그녀의 환영과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역시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되지만 사색적인 내용보다는 사랑을 중심으로 엮인 갈등만 부각되는 편이다. 다만 간간이 보여지는 솔라리스 바다의 신비롭고 역동적인 모습이 굉장히 아름다우며, 솔라리스로 오기 전 아내와의 다툼 끝에 아내의 죽음을 보게되는 과거의 이야기와, 솔라리스에서 만나게된 아내의 환영과 다시금 사랑에 빠지고 결국 다시 그녀를 보내게 되는 현재의 이야기를 겹쳐서 보여주는 연출이 일품이다.

 

솔라리스를 탐사하는 우주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imdb.com

 

신비와 불확실성 확대하는 <솔라리스>의 질문들

 

<솔라리스>는 미지에 대한 인류의 한계를 탐구하며, 인간 의식, 기억, 죄책감, 그리고 현실의 본질에 관한 깊이 있는 탐구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인간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솔라리스 바다는 여전히 인간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며, 그 의도나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소설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인류가 미지의 영역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남긴다. 결국 풀리지 않은채 마무리되는 솔라리스의 수수께끼는 우리에게 우주와 인간 지식의 경계를 숙고하게 만든다.

 

많은 SF 작품들이 명확한 해답이나 세계관, 그리고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반면 <솔라리스>는 오히려 신비와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렘은 작중의 '솔라리스학'의 발전과정을 통해 인간이 과학 탐구를 수단으로 이해를 추구하면서도 결국 더 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러한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역설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 줄 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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