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이다. 우주시대의 씨앗을 일찌감치 뿌려온 SF대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함으로써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이 코너를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우리는 글로벌 기업이 이루어낸 멋진 신기술을 보면 관용적으로 “외계인을 잡아다 만들었나?”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무릇 외계 생명체라면’ 기술력이 우리보다 뛰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몹시 강한 나같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의 기대 속에 담긴 인간의 기술적 능력에 대한 상대적인 불신이 못마땅하지만, 뭐 저 멀리서 지구까지 찾아온 외계인이라는 전제라면 아마도 지구인들보다 뛰어날 것이라는 그 생각이 타당할 것이다. 아직은.
그러면 그런 압도적인 기술력을 가진 개체가 지구에 온다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SF 작품들은 여기서 두 갈래길 중 하나를 택한다. 정복 아니면 구원. 그 사이는 없을까? 생각을 바꿔보자. 기본적으로 지구에 온 외계인이라면 낯선 땅에 온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기술도 있고 돈도 있지만 결국 혼자이기에 느끼는 고독, 남들과 다르기에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는 소외감. 이것은 더 이상 외계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외된 개인과 이들을 포용할 줄 모르는 인간 사회의 비극이다. 이런 조금 더 우아하고 감성적인 고민을 한 역사적인 작품이 있다.
우리에게는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원작자로 유명한 월터 테비스(Walter Tevis)의 <지구에 떨어진 남자(원제 “The Man Who Fell to Earth” 1963, 영화와 드라마 한글 제목은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이다. 영화 또는 록음악 팬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데이비드 보위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 작품으로 유명하고, 2022년에는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지구에 온 외계인 뉴턴의 비극적 이야기
안테아라는 행성에서 온 외계인 토머스 제롬 뉴턴. 그는 왜 지구에 왔는가? 안테아는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로 인해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했고, 뉴턴은 자신의 고향 행성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찾아왔다. 다만 에너지가 부족해 혼자 올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자원이 고갈되었다는 말은 연료도 없다는 얘기니까. 그의 임무는 우주선을 건조해 안테아의 300명도 채 남지 않은 인구를 지구로 이주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안테아인들을 데려올 커다란 우주선을 건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돈이다. 여기는 지구니까. 자본주의는 차갑다. 외계인이라고 예외로 할 순 없다. 처음에는 전당포에 안테아에서 만들어온 금반지를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물론 안테아인인 뉴턴은 전당포에 찾아가기 전에 인간으로 변장을 했다). 그리고 특허 변호사 올리버 판스워스의 도움을 받아 안테아의 뛰어난 기술을 이용해 특허를 내고, 강력한 기업 제국을 건설해 나간다.
그러나 그의 지적 능력과 성공, 그리고 동료 안테아인들을 데려오겠다는 명료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인 고립감에 고통스러워한다. 그의 우월한 지적 능력은 오히려 그를 고립시켰고, 가족과 남은 종족을 구하려는 막중한 임무는 그의 고독감에 물을 부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베티 조라는 여성과 가까운 관계를 맺지만, 자신의 정체와 임무를 그녀에게 밝힐 수는 없기에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다.
“너 누구야? 너는 어디에 속한거냐고!”
그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지만 거울 속 그는 도무지 자기 자신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외계인이었다.
뉴턴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기술에 대해 갖는 감정이란 놀라움과 반가움이었다. 하지만 교수 브라이스는 달랐다. 뉴턴이 이 땅에 선사한 기술은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그렇게 뉴턴이 적어도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품은 브라이스는 뉴턴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결국 정부까지 그의 활동에 의심을 품고 결국 그를 체포하게 되는데…
뉴턴은 비록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구에 왔지만, 그것은 침략이 아닌 공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구인들을 도울 생각이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되는 파멸의 길을 걷게될 운명인 미숙한 지구인들이 스스로 지구를 불태우지 않을 수 있도록. 과연 뉴턴, 그리고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는 자신의 파괴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까?”
뉴턴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인류에게 정말 그런 권리가 있다고 믿어요?”
자신의 종족을 위해, 인간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외계인 뉴턴, 그는 과연 우리에게 받아들여질까.
월터 테비스, 고독한 외계인을 그려내다
많은 SF 작품은 외계인을 정복자, 침략자, 혹은 구원자로 묘사한다. 반면, 이 작품은 외계인 주인공을 인간적이고 비극적인 존재로 그린다. 뉴턴은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신체적으로 취약하며(지구의 중력을 견디기 어려워 야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며 심지어 급상승하는 엘레베이터에서 기절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정심도 많은 인물이다. 베티 조에게 인간들의 종교와 관습, 그리고 술 문화를 배워서 온종일 취해있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알코올 중독자 외계인이라니, 지극히 인간적이고 참신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월터 테비스는 외계인을 '이방인'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런 감정적 깊이를 더해냈고, 바로 이 독창성이 이 작품을 SF 클래식의 반열에 올려냈다.
테비스는 뉴턴의 경험을 통해 고립과 소외, 그리고 지적 우월성의 대가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뉴턴의 뛰어난 지능, 외계에서 온 존재라는 그의 기원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다른 ‘그들’을 배척하는 본성을 지녔다. 물론 다름을 포용할 줄 아는 훌륭한 인간들도 있지만 적어도 인간의 총합으로서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랬기에 뉴턴은 결국 인간 사회에 완전히 융화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결국 우리를 파멸에 길에서 벗어나게 해 줄지도 모르는 뉴턴이라는 인간 천재의 이야기로 생각해보자. 그들은 사회에서 고립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결국 자신에 의문을 품게된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는 더 이상 뉴턴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를 그려내기 위해 뉴턴은 외계인이지만 인간과 매우 비슷한 존재로 묘사된다. 매우 가볍고 X선에 치명적이고, 지구 중력에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외적으로는 귓볼과 체모가 없고, 눈동자가 뱀처럼 가느다란 세로형이며, 일부 골격의 해부학적의 구조가 다른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전부다. 그가 지독한 고독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인간으로 변신하기 위해 착용하고 있던 콘택트렌즈와 인조손톱을 떼어내고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가면을 오래 쓰고 있었다면 나는 누구인가? 가면이 나인 것인가? 아니, 원래의 나라는 정체성이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장면은 데이비드 보위 주연의 영화에서는 이렇게 변장을 제거한 뉴턴의 본 모습을 메리 루(소설에서는 베티 조)가 보고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명장면으로 재탄생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뉴턴, 그 실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영화와 드라마, 당대의 '테마'를 반영한....
데이비드 보위가 주연을 맡은 니콜라스 로에그 감독의 1976년 영화는 소설의 기본 줄거리를 따르지만, 초현실적인 시각효과와 뉴턴의 심리적, 감정적 몰락과 같은 실존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의도적으로 모호한 요소를 추가하여 관객들에게 여러 해석을 남겼다. 예술적 촬영 기법을 통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감각적 화면을 창조해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거기다 존재 자체로 초현실성을 더해주는 데이비드 보위가 주연을 맡았으니 외계의 이질감, 그리고 뉴턴의 소외감을 그려내기 이보다 적절한 조합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아온 인간 중 지구에 떨어진 알코올 중독 외계인을 연기하기에 그보다 알맞은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외계인과 지구인간 축구 경기가 벌어졌을 때 우리는 데이비드 보위가 외계인쪽 응원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 보위가, 그리고 '지기 스타더스트' 앨범이 없었다면, 우주와 외계의 존재를 다룬 영상 작품에서 도대체 어떤 배경음악을 사용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잠시 이 자리를 빌어 2016년 우리 곁을 떠난 위대한 예술가를 기려본다. 'Starman’을 들으며...
여하튼 독특한 비주얼과 당대 최고의 록스타의 출연 덕분에 이 작품은 지금까지 수많은 컬트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22년에는 동명의 제목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원작의 각색이 아닌, 원작의 후속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치웨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안테아인 주인공 패러데이(뉴턴에 이어 지구의 위대한 과학자 이름을 따왔다)가 뉴턴이 실패한 임무를 완수해내기 위해 지구로 보내지며 겪게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뉴턴은 작품 내내 비관적인 모습을 보였던 반면 패러데이는 희망과 결단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작품도 원작에서의 인간의 결점과 그에 따른 인간의 필연적 자기파괴보다는 인간의 성장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희망적이다. 1963년과 2022년 사이에 인류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기술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지구에 떨어진 남자>의 각 버전은 각 시대의 테마를 반영했다. 1963년의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의 소외와 생태적 붕괴에 대한 엄숙한 이야기를 그려냈고, 1976년 영화는 비주얼과 감정에 중점을 둔 시각적인 예술 작품이 되었으며, 2022년의 TV 시리즈는 재생 가능 에너지, AI, 과학 발전을 지나친 이윤 추구에 악용하는 기업의 행태와 같은 현대적 주제와 확장된 세계관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이슈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철학적 탐구와 감정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인간의 결점과 가능성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테비스는 외계인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약점을 드러냈다. 지구의 풍부한 자원을 두고도 우리는 자기파괴적 경향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고, 뉴턴이 이타적인 목표로 도입한 안테아의 기술 혁신을 불신과 착취로 막아내며 새로운 가능성조차 거부한다. 작품에서는 명화 '이카로스의 추락'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2024년 인류는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반복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파멸이 다가왔다면, 공중에 있을 때 다가왔을 것이다.”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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