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가 사랑한 이 책,
킬킬 웃다가 마지막 페이지

[서평]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책세상

 

 

대체 우주를 왜 알아야 하는건데


‘우주가 대체 내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2살이었는지 21살이었는지 기억 나진 않는다. 술을 좋아했으나 술 마실 돈이 모자라 답답했던 시기. 한심한 20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더글라스 애덤스라는 인간이 쓴 어이 없이 기막힌 책이 있으니 읽어보라고 건넸다. 별자리 모양의 폰트로 이뤄진 글씨체. 파란색인 듯 검은색 같은 표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책세상)', 라는 제목의 소설책이었다. 황당한 노릇이었다. 남미나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으나 은하수를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까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주는 내 스무 살 인생을 채우는 불만과 짜증, 열망과 기쁨, 그 모든 것들 너머에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몇장이나 읽었을까. 아마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책과 교신을 시작한 것은.

 

 ‘이 행성을 떠나는 법.

1.나사에 전화하라. 전화번호는 (713)483-3111이다. 당신이 지금 떠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2.그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백악관-전화번호는 (202)456-1414-에 있는 아무 친구에게나 전화해서 나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 좀 해달라고 하라.

3.백악관에 친구가 하나도 없으면 크렘린에 전화하라. (0107-095-295-9051로 전화해 국제 교환수에게 크렘린을 대달라고 하라) 그 사람들도 백악관에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남들에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는 없다) 영향력은 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시도해볼만 하다.

4.그것도 안 되면 교황에게 전화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라. 교황의 전화번호는 011-39-6-6982다. 내가 듣기로 교황이 교환수는 절대로 잘못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5.이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 신호를 해서 지나가는 비행접시를 정지시킨 다음 전화 요금 청구서가 날아들기 전에 이 행성을 벗어나는 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라.’  

 

 

 

 

테슬라와 함께 우주로 간 이 책

온몸에 웃음 안테나가 켜진 기분이었다. 심장에 킬킬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은하수로 떠나야 하는 이유가 단번에 납득이 됐다. 이전까진 미처 몰랐을 뿐, 난 이 행성을 떠나고 싶었다는 걸, 저 말도 안되게 썰렁한 농담을 읽으며 단박에 깨달았다. 나의 20대의 심장은 그렇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게 빼앗겼다. 이 책은 우주와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해하는 가장 괴상하고 웃긴 가이드였다.

 

2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이 책은 여러모로 다른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 같다. 일론 머스크가 가장 사랑하는 책. 2018년 2월 1세대 테슬라 로드스터와 함께 우주로 발사된 책. 전세계에서 1400만부가 팔린 컬트 SF우주 대히트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잊었다. 그 사이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SF 소설을 읽을 여유를 잃었다. 아이를 낳았고, 주식 그래프를 매일 쳐다봤고, 부동산 뉴스를 읽었다. 내 심장은 킬킬 전기를 잃었다.

 

순수한 마음호에 탑승하다 
 뜻밖이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지난 주말, 나는 이 책을 다시 조우했다. 오래된 책장에서 먼지가 앉고 누렇게 색이 바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꺼냈다. 

넷플릭스를 보고 낮잠을 자는 대신 책의 첫 장을 폈고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책의 마지막 장을 삼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심장은 킬킬 전기를 잊지 않았다.

난 놀랍게도 20대의 그날처럼 다시 킬킬대고 있었다.  가령 ‘시간은 환상과 같다. 점심시간은 더 심한 환상이다. 점심 뭐먹지’ 같은 문장이나, ‘태초에 우주가 창조되었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으며 대부분은 이를 잘못된 조치라고 여겨졌다’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그랬다.

나의 더듬이는 아주 모처럼 은하계로 뻗어갔다. 월급도 야근도 상여금도 업무 고과도 아이의 학교 성적도 잠시 머리속에서 아웃오브갤럭시 돼 버렸다. 지구가 2분 안에 멸망한다 해도, 이 순간만은 잠시 괜찮을 것 같았다. 난 잠시 소설 속에 나오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를 타고 있었다. 몇백광년을 날아 베텔게우스 7행성에서 온 친구 포드 프리펙트와 타월을 타고 있었다. 세상 궁극의 대답을 우주에서 둘째 가는 컴퓨터 '깊은 생각(Deep Thought)'에게서 들을 준비가 그 순간 만큼은 돼 있었다. 그 컴퓨터가 “42”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도 화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난 이 비좁고 답답한 나의 인생이라는 행성을 떠나 우주와 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