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승의 신, 염라대왕 플루토
하데스(Hades)는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자들의 신, 저승의 지배자이다. 이 신은 로마로 넘어오면 플루토(Pluto)로 불리는데, 한자로는 명왕(冥王) 즉 염라대왕 되겠다. 하늘을 다스리는 신들의 왕 제우스와 바다를 담당하는 포세이돈에 이어 넘버3 쯤 되는 신인데, 그 존재감은 의외로 미미하다. 신화를 읽다보면, 플로투는 오히려 저승 입구를 지키는 머리 3개달린 괴물개 ‘케르베로스’보다도 분량이 적은 느낌이다. 이를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살아 숨쉬는 그 누가 죽음을 기꺼이 입에 담고, 저승의 신을 찬미하겠는가.
그러나, 과거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분류되었던 명왕성은 命名된 플루토 신보다는 존재감이 훨씬 컸다. 학교에서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배웠던 학생들에게, 명왕성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자주 못보지만 언제든 전화해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친구처럼 친숙한 존재였다. 과학 교과서에 실린(대다수는 이를 절대불변의 진리로 여긴다고!) 이 명왕성이 2006년 행성 자격에서 퇴출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의 행성천문학 교수 마이크 브라운의 책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롤러코스터 출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되게 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 명왕성, 미국의 자부심
행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그리스어에서 단순히 ‘떠돌이별’이라는 의미로, ‘하늘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떠돌이별 7개를 알고 있었다. 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행성으로 여겼던 달과 태양이다(이 7개가 월화수목금토일의 기원이다).
달과 태양이 행성 이라고? 그렇다. 이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의 시대였다. 그러나 망원경과 천체과학이 발달하며, 지구마저 태양 주변을 맴도는 행성의 하나임을 알게 됐다. 이어 유럽 천문학자들의 공로로 1781년 천왕성, 1846년 해왕성이 발견됐다.
명왕성은 1930년 2월 18일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가 발견했다. 그는 해왕성보다 더 먼 궤도를 돌고 있는 흐릿한 무언가를 찾았다. 물론 다른 행성들과 달리 원이 아니라 크게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렸고, 크기도 너무 작았지만 결국 아홉번째 행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70여년동안 사람들은 별다른 의문 없이 이 태양계 가장자리의 외롭고 이상한 천체를 자연스럽게 새로운 행성으로 받아들였다.
디즈니 강아지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플루토가 명왕성이 발견된 해에 탄생하기도 했고, 미국인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명왕성에 특별한 애정(행성 중 막내이고, 막내는 어디서든 사랑받는 법이다)을 갖고 있었다.
# 태양계의 10번째 행성을 찾아서
저자 마이크 브라운은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의 행성천문학분야 교수이며 천문학자다. 그는 명왕성 너머에 또 다른 행성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명왕성 이후로 추가되지 않은 태양계의 행성을 찾아 밤하늘 우주의 탐색을 시작했다. 당시 해왕성 바깥쪽에서 태양계 주위를 도는 200여개의 작은 천체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이 확인되어졌고, 이는 카이퍼 벨트(Kuiper Belt)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이 카이퍼 벨트에서 명왕성의 절반 정도 크기인 콰오아(Quaoar)를 발견했고, 또 태양계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세레스(Ceres), 마케마케(Makemake), 하우메아(Haumea)를 연달아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 태양계의 열번째 행성이 될 수 있는 명왕성보다 더 큰 천체를 발견한다. 그는 이 천체의 이름을 ‘제나’(이후 ‘에리스 Eris’라고 명명)라고 불렀다. 뉴욕타임스 1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이제 과학교과서만 새롭게 바뀔 일만 남은 듯 했다. 이 영광의 순간, 마이크 브라운은 뜻밖의 선택을 한다.
명왕성 킬러가 된 천문학자
마이크 브라운은 명왕성 외곽의 ‘에리스’를 발견하여, 태양계 10번째 행성의 발견자가 될 수 있었으나 스스로 명왕성과 이리스를 행성으로 분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둥근 천체라고, 태양계 주변을 돈다고 행성으로 봐야 한다면, 카이퍼 벨트에 있는 200여 천체도 새로운 행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는 명예보다 비난을, 세상과 타협하기보다 천문학자의 과학적 신념을 선택했다.
운명의 2006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행성의 정의와 분류를 놓고 국제천문연맹의 투표가 생중계로 진행됐고, 결국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에서 강등돼 ‘왜소행성’으로 전락하게 됐다.
그 순간 마이크 브라운은 말했다. “명왕성은 죽었습니다”
이 한마디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길거리나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왜 불쌍한 명왕성의 모가지를 날려버리신 건가요” 따져 물었고, 그를 비난하는 수많은 이메일이 쏟아졌다. 캘리포니아 지역 퍼레이드에선 몇몇 천문학자들이 명왕성을 위한 장례식을 치르며, 참석한 저자에게 ‘마이크 브라운; 명왕성 킬러’라는 이름표까지 걸어주었다(물론 저자는 아내와 딸과 함께 참석해 이 퍼레이드를 즐겼다).
그는 심지어 10번째 행성이 될 뻔한 천체 ‘제나’의 공식이름을 ‘에리스’로 지었다. 에리스는 그리스 신화 속 갈등과 불화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행성의 발견자에서 행성의 킬러가 된 저자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우주의 한 자락을 엿보는 천문학자의 고백
이 책은 과학적 사실을 대하는 천문학자로서의 신념의 자서전이자 일기이다. 열 번째 행성이 될 수도 있었던 천체를 찾은 장본인이 명왕성의 퇴출을 이끌었다는 역설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딱딱한 과학서적이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저자는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되는 과정을 자신의 결혼과 딸의 출산 등 일상의 삶과 함께 우주 탐구의 지난한 과정을 일기처럼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어려운 수학이나 물리학도 거의 나오지 않아 술술 읽힌다. 망원경 관측은 어떻게 하는가, 새로운 천체는 어떻게 발견하고 이름을 짓는가 등등의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 책에는 천문학 분야의 소소한 재미와 상식들이 가득하다.
한국인은 태양계의 행성을(명왕성 퇴출 전) 수금지화목토천해명(수성Mercury 금성Venus 지구Earth 화성Mars 목성Jupiter 토성Saturn 천왕성Uranos 해왕성Neptune 명왕성Pluto)으로 외웠는데 미국인들은 이런 문장으로 외운다고 한다
‘My very excellent mother just served us nine pizzas!(나의 최고로 좋은 엄마가 바로 우리에게 피자 아홉 판을 만들어주셨어!)’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 태양계 천체와 원소이름과도 연계를 알 수 있다. 새로 발견된 천체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새로 발견된 원소기호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왕성(Uranus)이 발견되고 새로 발견된 화학원소의 이름은 우라늄(Uranium)이 되었고, 명왕성(Pluto)이 발견되고 새로 발견된 화학원소의 이름은 플루토늄(Plutonium)이 되었다. 요즘 러시아에서 핵을 쏠지 말지 시끄럽고, 북한도 연일 핵능력을 과시하는 판국이라 그런지 이 ‘플루토늄’의 어원을 알고 흠칫했다. 수많은 인명을 해칠 수 있는 핵무기의 재료 ‘플루토늄’이 저승의 신 플루토와 연관 있다니… 어쩐지 가슴 한켠이 서늘하지 않은가.
# 명왕성은 죽지 않았다
저자는 “명왕성은 죽었다”고 했지만, 명왕성은 죽지 않았다. 비록 태양계 행성의 지위에서 강등돼 ‘왜소행성 134340’이 됐지만, 여전히 태양계의 끝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다. 죽은 자들을 지배하는 저승의 신이 죽었다는 넌센스. 오히려 이 명왕성 강등 사태를 통해, 우주를 향한 인류의 지식과 호기심은 더 커지고 넓어졌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행성 사냥꾼’이자 ‘명왕성 킬러’인 저자 마이크 브라운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참고로 그는 여전히 태양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천체들을 탐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