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우주로
이주시켰더니...

[우주를 소재로 한 영화 '정이']

※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인류가 이주한 ‘우주 쉘터’
영화가 시작되면 한편의 자막이 흐른다. ‘가까운 미래.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류는 우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에 인류가 살 수 있는 쉘터를 만드는 데에 성공한 인류는 80여 개의 쉘터에 시민들을 이주시킨다…’

이후 전투장면이 이어지고, 이는 한 연구소가 AI 사이보그 ‘정이’의 시뮬레이션 실험이었음이 드러난다. 영화 ‘정이’는 22세기말을 배경으로 AI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 팀장이 수십 년에 걸친 내전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던 군인의 뇌를 복제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 자막에서 나오는 우주 쉘터나 반란군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주 전쟁 같았던 설정은 사라지고, 연구소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로 변한다. 우주 쉘터는 우주 정거장이 무수히 결합된 형태일 확률이 높은데, 이 영화엔 그런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의 배경은 지구로 보인다. 초반 자막은 그저 ‘이 영화는 미래를 설정한 SF’라는 설정일 뿐, 아쉽게도 스토리 전개에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로보캅 설정은 있는데...
‘자녀를 둔 가장이 경찰이나 군 작전에 나가 사망한 뒤, 기계와 결합해 전투병기로 거듭난다. 이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새로운 영웅이 된다’ 이런 내용은 할리우드 ‘로보캅’(1987년작) 이후 공식처럼 반복돼온 내용이다. 그러나 영화 ‘정이’엔 로보캅이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철학이 조금은 부족하다.
회장이 정이의 딸인 윤서현 박사(강수연 분)에게 한 대사는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뇌 복제 기술이 나왔을 때 ‘영생’을 떠올렸고, 곧바로 자신의 뇌 데이터로 AI로봇을 만들었는데 "별로"라고 말한다. 전기밥솥에 ‘애야 밥먹어라’ 엄마 목소리를 녹음해 기능을 만들어도, 엄마가 지어준 밥맛은 안난다는 것. 

 


1987년에 나온 영화 로보캅의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다. 최근 주목받기 시작하는 ‘두뇌 임플란트’는 나이를 먹을수록 손상되는 기억을 방지하기 위해 뇌에 칩을 이식하는 치료법으로, 쉽게 말하면 컴퓨터의 메모리칩처럼 보조기억장치를 뇌에 이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아픈 상처나 트라우마와 같은 나쁜 기억을 걸러내는 역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은 동물실험 단계이고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린다지만, 만약 인간의 뇌가 컴퓨터 칩과 연동되어 제어되는 경우 ‘인간인지 컴퓨터인지’ 정체성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정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 미래에 충분히 불거질 가능성 있어 보인다.

 

모성애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SF영화에서 모성애를 갖춘 여전사는 단골 소재로 쓰였다. 에어리언2에서 리플리(시고니 위버 분)는 한 소녀를 지키기 위해 괴물과 싸우고, 터미네이터2에선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분)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온 로봇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 영화 ‘정이’는 이 공식을 조금 비튼다. 딸이 엄마를 전투 AI로 개발하고, 엄마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뇌가 복제된 사이보그가 된 상태에서도 딸이 준 마스코트를 잃어버린 것(저장된 마지막 기억)에 아파하고, 어린 딸의 수술이 성공했는지를 물어본다.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심지어 기계가 되어서도 딸을 잊지 못한다. 

 

흥미로운 뇌 복제 A·B·C타입
뇌를 복제해 의체(기계몸)로 옮기는 데 A·B·C 세가지 타입으로 나누는 스토리는 신선하다. A타입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인간에 준하는 권리를 받는다. B타입은 뇌 데이터를 정부에 제공하지만, 결혼·거주이동의 자유·아동입양 등의 권리 외에는 인간의 기본권을 법으로 보장받는다. 돈이 없는 이들은 C타입을 선택하는데, 인간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 이는 특정 기업에 뇌 데이터를 전부 넘기고 비슷한 클론들을 양산하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즉, 생명 연장을 대가로 자신의 뇌를 상업적으로 넘기는 꼴이다. 

 

문제는 연합군의 영웅이자 전투 아이돌이었던 ‘정이’가 식물인간이 된 후, 남겨진 가족의 동의로 이 ‘C타입’이 된 것이다. 40년간 이어진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전투 AI는 폐기 수순에 돌입하고, 정이는 가정용 AI로봇이나 성적인 용도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딸인 윤서현 박사를 분노하게 만들고, 결국 엄마(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기억을 가진 로봇)를 탈출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행복하게 한다고 누군가는 선전하지만, 실제는 영화 내용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우주와 미래조차도 힘 있는 소수가 선점하고, 대다수는 소외되는 설정은 이 영화가 예측한 미래이다. 


지난 1월 20일 넷플릭에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작품 ‘정이’. 배우 강수연의 유작이기에 더 기대가 컸다. 영화에서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고, 엄마 ‘정이’를 탈출시킨 후 죽어가는 강수연의 모습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현실과 오버랩되어 울림을 준다. 또한 영화 말미, 모노레일에서 사이보그끼리 펼치는 전투 액션은 꽤나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