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후에 비로소 드러나다,
비운의 우주 천재

[우주人]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ICBM과 인공위성 처음으로 쏘아올린 사나이
조국 소련이 끝까지 숨겼던 과학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함께 존경하는 영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영웅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을 넘었다. 러시아가 빠르게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전황을 장기화로 이끌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나라에서 모두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인물이 있다. 바로 냉전 시대에 소련 우주탐사를 이끈 ‘천재 로켓과학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1907~1966)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엔 코롤료프市가 있다. 러시아에서 10여 년을 거주한 선교사에게 물어보니, 학교에서도 그를 영웅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게다가 화성에는 그의 이름을 딴 ‘코룔료프 충돌구’도 있다. 대체 코롤료프가 무슨 일을 했길래,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일까?

 

인생 최대의 시련, 시베리아 수용소행
코롤료프는 1907년 키이우(현재 우크라이나 수도) 근방에 있는 지토미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3세가 되던 해 부모가 이혼했고, 그는 외조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유년기를 보낸 도시 오데사에는 군용 수상비행기 부대가 있었는데, 매일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며 코롤료프는 하늘과 우주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17세에 글라이더를 설계할 정도로 될성부른 떡잎이었고, 이후 키이우 공대와 모스크바 바우만 공대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코롤료프는 소련 항공기 설계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그의 삶마저 뒤흔들었다. 수많은 군인과 기술자들이 반역자로 몰려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는데, 코롤료프가 32세일 무렵 한밤중에 비밀경찰이 들이닥쳤고 잠자던 딸에게 인사도 못한 채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의 죄목은 액체로켓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에 필요한 고체로켓 연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는 1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콜리마라는 항구로 유배되었다. 이곳은 탐험도 되지 않은 곳이 많았던 오지로, 당시 수용소 사망자가 최대 200만 명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었다. 코롤료프가 훗날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콜리마에서 보낸 5개월간 12개 이상의 치아가 빠졌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턱뼈가 부러지고 심장병을 얻는 등 몸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았고, 이때 얻은 심장병은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지인들의 도움으로 재심을 받게 되었고, 환경이 그나마 나은 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수용소를 ‘샤랴슈카’라고 불렀는데, 과학자와 엔지니어들만 골라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일할 수 있게 한 곳이었다. 로켓 엔진과 항공기 설계를 계속하던 그는, 1944년 방면되었고 죄 또한 모두 사라져 육군 소속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미·소, 독일의 V2로켓 기술·인력 회수 작전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탄도미사일 V2로켓을 개발했다. 탄도는 포탄이 날아가는 모양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는 뜻이고, 미사일은 로켓을 장치해서 그 힘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무기이다. 일단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간 후, 떨어지면서 쭉쭉 뻗어나가 빠르게 목표물에 내려꽂힌다. 독일군은 V2로켓 수천 발을 발사해 바다 건너 영국을 공격했다. 당시 V2는 정확성이 많이 떨어지고 높은 가격에 비해 위력이 약했다.

 

그러나 이 탄도미사일의 출연은 미국과 소련 등 강국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원자폭탄을 폭격기에 실어서 어떤 도시에 떨어뜨리는 것보다, 탄도미사일에 탑재해 발사하는 게 훨씬 위력적이고 최종병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유효한 핵심 전략개념이다(하루걸러 탄도미사일을 쏘며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 북한을 생각해보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가까워오자 소련은 독일의 V2 생산 공장들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코롤료프도 V2의 기술 습득을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다. 소련은 V2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배급 확대와 많은 연봉 등 특전을 내걸었지만,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핵심 인재들 600여명은 미국에 투항했다. 천신만고 끝에 헬무트 그뢰투룹 등 소수의 과학자들만 확보할 수 있었던 소련은 이들을 때로는 협박하고 때로는 구슬리며 V2 도면을 그리게 했고, 독일 로켓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시켜 1947년 V2를 복제해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독일 과학자들로부터 기술을 빼먹을 만큼 빼먹은 소련은 1952년부터는 소련인들로만 구성된 연구소에서 개발을 진행했고, 그 중심엔 코롤료프가 있었다.
  
세계 최초 대륙간탄도미사일 ‘R7 로켓’을 만들다
1957년 8월, 코롤료프를 비롯한 소련 기술진은 걸작으로 손꼽히는 R7 로켓 시험에 성공했다.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이 로켓은 수천Km를 날아가 캄차카 반도에 있던 표적을 정확히 맞추었다. R7은 흔히 ‘세묘르카(숫자 7을 뜻하는 러시아어) 로켓’이라고도 불리는데, 우주 높은 곳으로 치솟았다가 내리꽂으며 8000km 이상의 먼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 머리 부분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쏘면, 소련에서 미국의 주요 도시를 단숨에 공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대륙 사이를 날아다니며 공격하는 미사일이라고 해서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le·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요즘 북한이 ‘괴물 ICBM’이라는 화성-17형을 성공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시초가 바로 코롤료프가 만든 R7 로켓인 셈이다.  

 


코롤료프는 무거운 무게를 싣고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무기가 아닌 인공위성을 띄운다는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1957년 10월 4일, R7 로켓을 개조한 장치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는데 성공해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전 세계의 연구진과 방송 기술자들은 스푸트니크 위성이 지구를 돌며 내뿜는 ‘삐, 삐’ 전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소련이 발사 단추만 누르면 즉각 세계 어느 나라에든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소리를 의미했다. 군사우주 분야에서 소련을 앞서나간다고 생각했던 미국에게 있어, 소련의 인공위성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미국 사회에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이후 미사일과 우주개발에서 소련을 추격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탄력받은 코롤료프는 소련 지도부의 지원을 얻어냈고, 그의 오랜 꿈이었던 우주 탐사를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R7 로켓을 계속 개량하며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 개발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이고, 여기에 실린 개가 바로 그 유명한 라이카이다. 그는 이후 계속 생물체를 태워 보내는 실험을 하여 데이터를 모아 우주에서 생물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했다. 


1961년 4월 12일, 마침내 코롤료프와 휘하의 기술진들은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호를 발사하며 사상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냈다. ‘보스토크’는 동방이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우주로 나간 가가린은 창밖의 광경을 기술하며, 자신이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며 생리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전했다. 1시간 29분간의 인류 역사상 첫 우주비행에 성공한 가가린은 소련의 영웅을 넘어, 세계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당시 흐루쇼프 소련 수상은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가가린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아, 우리를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라고 소리쳤다.


미국은 또 한 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전세를 뒤엎을 방법은 ‘유인 달 착륙’ 이외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62년 9월 12일, 케네디의 유명한 “우리는 달에 가는 것을 선택한다” 연설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다.  코롤료프의 꿈 또한 달에 도달해 있었다. 최근까지도 활용되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러시아의 소유스 우주선이 이때 나온 코롤료프의 유산이다. 달 탐사선으로 설계된 소유즈는 50여 년 동안 계속 개량되어 사용되고 있는 명품으로, 2008년 한국의 이소연 박사가 우주정거장에서 과학실험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탔던 우주선도 바로 소유스 계통의 로켓이었다. 

 

극비의 존재, 죽은 뒤 유명해지다
달에 사람을 착륙시킨 후 귀환시키려면 엄청난 추력을 가진 발사체가 필요했다. 미 정부의 무제한급 지원을 받은 폰 브라운은 ‘새턴V’라는 최강의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던데 반해, 코롤료프의 상황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핵폭탄·ICBM 같은 무기에 더 관심이 있었던 소련 정부의 뜨뜻미지근한 지원과 소련 내 다른 라이벌 과학자들과의 경쟁은 코롤료프를 지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보다 우주 경쟁에서 뒤지면 정부가 예산을 깎을까봐 노심초사했고, 이것이 그를 과로로 이끈 요인이 되었다. 


1966년 1월 14일, 그는 59번째 생일을 아흐레 앞두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가 그의 복부를 절개하자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암 덩어리가 발견됐다. 수술은 다섯 시간 이상 길어졌고, 수용소 시절 손상을 입었던 코룔료프의 심장은 수술을 견디지 못했고 그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이틀 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그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훈장을 달고 찍은 코롤료프의 사진이 실렸고, 이로써 로켓 수석설계자로만 알려졌을뿐 이름도 얼굴도 없었던 그의 존재가 죽음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소련 KGB는 코룔로프와 핵심연구팀들이 미국으로부터 암살당할 것을 우려해 모든 신상정보를 극강의 기밀 처리로, 살아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관리를 해왔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을 홍보하는 순간에도 코롤료프의 이름은 없었다. 소련은 아무 관련 없는 2명의 과학자를 내세웠고, 이들이 ‘붉은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며 모든 영광을 가져갔다. 때문에 미국의 폰 브라운도 국장으로 치루어지는 장례식을 신문으로 접하고 나서야, 코롤료프의 이름과 업적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화장된 코롤료프의 유골은 ‘붉은 광장’으로 움직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으며, 그것으로 그의 열정도 꿈도 달 착륙도 모두 끝났다. 살아생전 누리지 못했던 영광과 박수갈채를 죽어서야 누리게 된걸까.

 

미국에 폰 브라운이 있다면, 소련엔 코롤료프가 
코롤료프는 R7 로켓으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고, 최초의 우주인을 지구 궤도에 쏘아 올렸다. 독일 출신으로 V2 로켓을 개발한 후 미국에 투항한 폰 브라운은 새턴V 로켓으로 아폴로 우주선을 발사해 인류 최초로 달을 밟는 신기원을 이뤘다. 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며, 냉전의 한복판에서 우주개발을 이끌었다. 폰 브라운과 달리 코롤료프는 공산권 국가의 인물이라서 그런지, 한국에는 많이 안 알려진 듯하다. 신문 기록을 뒤져봐도, 코롤료프는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ICBM, 인공위성, 유인 우주선… 이 모든 것을 세계 최초로 이뤄낸 사나이가 아닌가. 냉전시대 이후 오늘날 다시 찾아온 ‘우주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그는 꼭 기억돼야 할 우주인이다. 
 
*참고도서
로켓을 꿈꾼 소년들(정규수·정광화 지음, 지성사)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곽재식 지음, 동아시아)세계 최초의 인공위인성 스푸트니크 1호의 모형/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