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나온 영화 패신저스(Passengers)는 인류가 거주할 제2의 행성을 가는 120년 간의 동면(冬眠ㆍhibernation) 우주여행에서 계획과 달리 탑승객 3명이 먼저 깨어나면서 우주선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공상과학 러브스토리다. 이 우주선에 탄 50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긴 우주여행에서 4개월만 빼고는, 동면 포드(pod)에서 무기력 상태인 토퍼(torpor)에 빠진다. 인간이 겨울잠을 자듯이 장기간의 우주여행을 하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2030년대 후반~2040년대 초반 실제로 인류가 화성에 첫발을 디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인간의 동면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화성은 앞으로 핵분열 로켓이 등장해도, 가는 데만 석 달 이상이 걸린다.
지난달 1일 미 항공우주국(NASA)은 1년 중 7~8개월을 동면하는 북극땅다람쥐를 연구하는 알래스카대 연구진에게 지원금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유럽우주국(ESA)도 작년에 “인간의 동면은 공상과학 수준의 상상을 뛰어넘어, 우주여행에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원래 겨울잠을 자지 않는 생쥐의 경우에도, 인위적으로 동면과 같은 상태를 유도했다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왕복에 2년이 걸리는 화성 여행을 동면 상태로 다녀올 수 있다면, 우주인들의 식음료와 일상용품 부피, 거주공간 크기는 크게 줄고 우주선도 작아질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이렇게 장기간 ‘최대 절전 모드’를 유지할 수 있을까.
NASA, 동면 중에도 근육ㆍ뼈 손실 없는 북극땅다람쥐에 주목
NASA는 20년 이상 동면 동물을 연구해온 알레스카대(페어뱅크스 소재) 켈리 드류 생화학과 교수의 북극땅다람쥐 동면 연구를 지원하면서 “우주인에게 동면을 의학적으로 유도할 수 있으면, 장기간 미션 중 기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우주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몸무게가 700g 정도인 북극땅다람쥐의 비(非)동면 시 체온은 37°C이지만, 동면 중에는 혈액이 얼기 직전인 -2.9°C까지 떨어진다. 이 다람쥐는 이렇게 해서 신진대사를 억제하고,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NASA가 이 설치류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렇게 신진대사를 극단적으로 느리게 해도, 근육과 뼈가 손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 주~수 개월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으면, 근 손실과 골밀도 저하가 뚜렷이 증가한다.
유사(類似) 동면 상황에서 살아난 인간들
매우 드물지만, 인간도 동면과 비슷하게 급격히 체온이 저하됐다가 살아난 경우가 더러 있었다. 2015년 1월 미국 미시간 주의 한 호수에서 14세 소년이 살얼음 밑 물속에 15분간 빠져 익사했다. 심폐소생술로도 살리지 못했지만, 부모가 작별 기도를 하는 동안에 살아났다. 이 소년은 뇌와 신경세포에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았다.
또 1995년 독일 하노버에서도 4세 아이가 라인강에 빠져 급류에 떠내려갔다. 두 시간을 넘겨 발견된 아이의 심장은 멎었고, 체온은 20°C에 불과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아이의 흉부를 따듯하게 한 결과, 다시 심실이 뛰어 살아났다. 의료진은 아주 차가운 물이 급속히 체온을 떨어뜨려, 신진대사의 토퍼(torpor)를 초래한 것으로 추정했다. 토퍼는 동물이 동면 중에 체온과 신진대사를 극도로 낮춰,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일종의 휴면(休眠)·무기력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2005년 일본 고베에서도 35세의 공무원이 인근 롯코(六甲)산에서 조난당했다. 그는 10도의 가을 기온에 기절했고, 24일 발견됐을 때 체온은 22.3°C였다. 여러 장기(臟器)가 손상됐지만 50일만에 퇴원한 그는 그 다음날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일본 의료진도 “그가 마멋(groundhog)과 같이, 동면과 비슷한 상태에 빠진 것”으로 봤다.
동면하지 않는 동물에도 인위적으로 토퍼 유도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GSI 헬름홀츠 센터가 국제 연구진은 작년 11월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동면을 하지 않는 쥐에 대해서도, 동면하는 동물이 겪는 토퍼 상태를 인위적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인위적 동면을 유도하자, 실험 대상 쥐의 신진대사와 산소 섭취량이 감소했고, 심박수가 느려졌다. 또 분자 수준에선, 유전자 활동과 단백질 생합성도 느려졌다.
이 연구가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인위적으로 토퍼를 유도한 쥐의 방사선 저항력이 높아졌다는 점이었다. 세포 조직의 낮은 산소 농도와 낮은 신진대사율은 방사선으로 인한 세포 손상을 막았다. GSI의 마르코 두란데 생물물리학과장은 “인위적인 토퍼 상태가 장기간 우주 미션에 나서는 생명체의 방사선 보호 수준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주인은 우주 비행 중에, 지구에서의 안전한 자연방사선 배경 준위의 200배 이상 되는 은하우주방사선에 오랫동안 노출된다. 그런데 이런 인위적 동면이 인간에게도 가능하다면, 방사선으로 인한 인체의 조직 손상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일본 쓰쿠바대는 2020년 체내의 복잡한 온도 회로와 관련된 뇌세포를 찾아내, 자연 상태에선 겨울잠을 자지 않는 생쥐들에게 실험했다. 연구진은 약물을 주입해 마치 스위치를 켜는 것처럼 Q 뉴런이라고 이름 붙인 이 뇌세포를 통제했다. 그러자, 생쥐는 체온이 36도에서 22도로 떨어지고 심박수와 호흡이 느려졌다. 일부 생쥐는 이틀 이상 이런 동면 상태에 있었지만,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연구진이 Q 뉴런 스위치를 끄자, 생쥐들은 뇌ㆍ심장ㆍ간ㆍ신장에 이상이 없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ESA “여성이 남성보다 동면에 유리할 수도”
작년 1월 유럽우주국(ESA)에서 우주인의 동면과 관련한 보고서를 낸 제니퍼 은고-안은 “화성 왕복 우주선의 우주인 보급품이 1인당 1일 30㎏에 달할 것이라고 하는데, 우주인의 신진대사율을 정상의 25%로 낮출 수 있다면 장기간 좁은 공간에 갇힌 우주여행에서 비롯되는 지루함과 외로움, 공격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함께 연구에 참여한 독일 루드비히 막시밀리안스대 의대 교수인 알렉산더 초우커는 “겨울잠을 자는 곰은 동면 전에 추가로 지방을 보충하고 6개월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며 “동면에서 깨고 20일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고 근손실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낮은 수준의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포유류의 긴 동면을 돕고, 여성호르몬 에스토겐은 에너지의 신진대사를 조정해, 여성이 동면에 더 적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ESA의 과학자들은 최적의 동면 환경으로, 영상 10도 이하의 낮은 기온과 높은 습도, 낮은 조명이 유지되는 소프트쉘(softshell)로 만든 아늑한 포드(pod)을 권고했다. 각 포드 주변은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물로 채워지고, 포드의 크기는 몸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정도다. 휴면에 들어간 우주인들의 몸에 부착된 센서가 자세와 체온, 심박수 등을 체크하는 동안, 우주선은 기본적으로 인공지능 컴퓨터가 조종한다. 그러나 인간은 곰이 아니다. 인간이 6개월간 그렇게 잠을 자면, 뼈와 근육의 손실이 엄청나고 심장마비 위험성도 커진다.
”장기간 여행하는 우주인들, 2주씩 교대 동면”
NASA의 지원을 받아 2016년에 1차 연구 결과를 냈던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의 우주항공 기업인 스페이스웍스(Spaceworks)는 시간당 1도씩 인체의 심부(深部) 체온을 32도까지 낮추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 회사는 병원에서 심장 기능이 일시 정지된 환자의 체온을 인위적으로 내려, 신진대사와 산소 소비량을 감소시켜서 뇌세포 파괴를 막는 저체온 치료법에 착안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이 저체온 요법은 환자에게 기껏해야 수 일 적용할 수 있고, 중국에서 부작용 없이 14일까지 이 요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스페이스웍스는 영화 패신저스처럼 120년 동안 계속 자는 것이 아니라, 우주인들이 2주씩 교대로 토퍼 상태에 들어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토퍼 상태의 우주인은 영양소로 채워진 액체에 담기며, 신진대사가 평소의 50~70%까지 내려간다. 다른 우주인들이 토퍼 상태에 있는 동안, 3~4일의 활성 기간을 거쳐 깨어난 우주인들이 우주선을 관리한다. 이렇게 되면, 장기 항해에 나서는 우주선 크기를 52~68%까지 줄일 수 있고. 기술과 공간을 우주선 속도와 방사선 차단에 더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페이스웍스의 CEO인 존 브래드포드 박사는 “화성이 아니라, 가는 데 고작 3일 걸리는 달에도 1000명을 한 번에 보내려면 인프라 시설이 매우 복잡해진다”며 “지구에서 토퍼 상태에 들게 한 탑승객들을 달에 착륙하고 며칠 뒤에 깨우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건강한 우주인을 어떻게 동면 상태로 유도하느냐, 장기 우주여행에서 뼈와 근육의 손실을 어떻게 막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는 남는다. 우리 몸은 무중력 환경에 맞춰 설계된 것이 아니어서, 뼈와 근육은 장기간 체중을 지탱할 필요가 없어지면 급속히 약해진다. 2009년 NASA 연구에선 6개월간 우주에 머무르면, 14% 이상의 뼈 손실이 발생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이를 방지하려면 계속 운동해야 하는데, 토퍼 상태의 우주인에게는 불가능하다. 이 회사는 해결책으로 토퍼 상태의 인체에 작은 전기 자극을 보내 근육의 수축을 지속적으로 유발하고, 약물을 투여해 골밀도 저하를 완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장기간 무중력 상태에 노출되면, 혈액과 체액이 상체로 쏠리면서 두개(頭蓋)내 혈압이 커지고 시력 장애 현상을 겪게 된다. 이걸 해결하려면 우주선에 인공 중력을 제공해야 하는데, 이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실현된 것은 없다.
”덩치가 큰 포유류는 동면 때, 에너지 더 쓴다”
한편, 작년 4월 영국 왕립학회보에는 인간의 장기간 동면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는 논문이 게재됐다. 남칠레대학교 환경ㆍ진화연구소의 로베르토 네스폴로는 “아주 작은 포유동물과 큰 포유동물의 동면 시 에너지 절약 정도가 다르다”고 보고했다. 즉, 몸무게 45g에 손바닥만 한 크기인 칠레주머니쥐과의 모니또 델 몬토는 동면하면서 정상 활동 시 소비하는 에너지의 76%를 절약했다. 동면하는 갈색박쥐와 피그미쥐의 에너지 절약률은 98%에 달했다.
그러나 180㎏짜리 회색곰은 동면 시 에너지 절약률이 -124%였다. 활발히 움직일 때보다 동면할 때 에너지를 더 썼다는 얘기다. 75㎏짜리 작은 곰은 동면 때와 활동 때의 에너지 소비가 비슷했다. 네스폴로는 “작은 동물들은 활발히 움직일 때 체온 유지를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또 동물에 관계없이, 몸무게 g당 동면 시 사용하는 에너지는 같았다. 이는 박쥐보다 2만배 무거운 회색곰은 동면 시 에너지도 박쥐보다 2만 배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몸무게가 45㎏이 넘는 동물 중에서 동면하는 것은 곰이 유일했다. 네스폴로의 추론은 곰처럼 큰 덩치인 인간은 유도(誘導) 토퍼에 빠져도, 에너지 절약률은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또 인간의 동면을 둘러싼 연구에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문제가 따른다. 그는 “누가 동면을 위한 약물 테스트, 유전자 변형, 동면 유도 처치술에 자원하겠느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