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이대로 가면
우주의 구경꾼 된다"

유럽 우주국 ESA 보고서에 '경고의 목소리'
“10년 내 유럽 자력으로 달에 못가면 구경꾼 전락"
"20년 전 인터넷 붐 놓쳤던 것처럼, 거대한 테크 붐 놓칠수도"

유럽우주국(ESA)이 지난 23일 우주 탐험과 개발의 솔직한 자화상(自畵像)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했다. ESA는 각국의 우주·과학 정책결정자, 정치인, 탐험가, 기업 컨설턴트, 과학 언론인 등 12명으로 구성된 고위급 조언그룹(HLAG)에게 전세계 우주생태계 안에서 유럽의 위치를 평가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보고서는 “현재 유럽이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에서, 아예 다른 우주 강대국들의 우주 경쟁의 ‘구경꾼’으로 몰락할 수 있다”며 우주 개발에서의 “혁명적 전환”을 주문했다 ‘우주의 혁명(Revolution Space)’이란 제목의 보고서는 “지금은 20년 전 인터넷 붐 시대의 변곡점(變曲點)과 비슷하다”며 “유럽 자력으로 우주선을 만들어 10년 내 달에 가지 못하면, 또 다시 거대한 테크 붐을 놓치게 된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동시에 인터넷 혁명을 맞고도, 구글·아마존·페이스북과 같은 거대 IT 기업을 유럽에서 단 하나도 배출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실책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현재 ESA 소속 우주인들은 미 항공우주국(NASA)와 계약을 맺은 미 민간기업 스페이스X의 드래곤 크루 캡슐에 한 좌석을 얻어 국제우주정거장(ISS)에 간다.


보고서는 “독립적으로 우주에 접근하고 자율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없는 국가나 지역은 전략적으로 의존적이 되고, 우주산업의 밸류체인(value chain)에서 주요 부분을 잃게 된다”며 “유럽은 2040년까지 1조 유로(약 1407조 원)로 예상되는 우주경제 시장의 3분의1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SA는 그동안 미국의 달·화성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Artemis) 프로그램에서, 달 궤도를 돌고 온 오리온 크루(crew) 캡슐의 서비스 모듈이 ‘유럽 기술’로 제작됐다는 점을 부각했다. 서비스 모듈은 우주인이 탑승하는 캡슐에 전기·물·산소·질소를 공급하고 온도와 코스 조정을 하는 중요한 모듈이다. 
 


작년 8월 ESA의 조지프 아슈바허 국장은 “NASA가 대표적인(flagship) 우주 미션에서 이토록 중요한 요소를 ESA에 의뢰한 것은 처음”이라며, 아르테미스를 늘 미국·유럽의 합작 프로그램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보고서는 보다 솔직했다. 우주 경쟁에서 ‘구경꾼’ 신세가 될 위기에 처한 유럽의 우주 현실을 드러냈다. 

 

30년 전 독자적 우주왕복선 포기…‘주니어’ 역할 선택
유럽은 전통적으로 천체망원경·위성 항법장치·지구 관측 등의 우주과학에 초점을 맞췄고, 그 분야 업적은 선도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의 유인(有人) 우주 탐험 분야에선 리더십과 자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NASA와, 러시아(작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전)의 주니어 파트너를 자원했다. 그러니, ISS로 갈 자체 우주선(캡슐)도 없이 두 나라의 신세를 졌다.


ESA는 1980년대에 ISS를 오가는 에르메스(Hermes) 우주왕복선 개발에 나섰지만, 1992년 결국 포기했다. 미국의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에 대항해 1987년 프랑스우주국(CNES)이 시작한 프로젝트를 ESA가 넘겨받았다. 길이 19m인 이 우주선은 3명의 우주인을 태우고 고도 800㎞까지 오르며, 30~90일간 우주에서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발됐다.

 


에르메스를 우주로 발사하려고 개발한 로켓이 아리안 5였다. 에르메스의 총중량은 21톤. 이는 아리안5 로켓이 저궤도(LEO)까지 발사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러나 에르메스의 시험 발사 연도는 최초 1998년에서 2002년으로 계속 늦춰졌고, 막대한 개발 비용 탓에 결국 철회됐다. 그 결과, 유럽 출신 우주인은 2025년 말 아르테미스 3단계, 또는 4·5단계에서 미국 스페이스X의 스타십 달 착륙선을 타고 처음으로 달 표면에 내리게 된다. 독자적인 우주선이 없는 유럽의 우주 탐험 스케줄은 제3자가 결정한다. 


유럽이 지구·달 궤도와 달 표면, 그 너머에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확립하려면, 유럽만의 우주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보고서는 “저궤도에 유럽 차원의 민간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고, 달 궤도의 루나 게이트웨이와 달 표면까지 갈 수 있는 독립적인 유인·화물 우주선을 가져야 한다”며 “유럽인이 선장을 맡는 유럽 우주선이야말로 진정한 유럽의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식탁에 못앉으면, 메뉴에 오르게 된다”
미국은 매우 적극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풍부한 벤처 자본, 친(親)기업적인 미국 정부의 우주장비 조달 정책에 힘입어 혁신적인 기업들을 우후죽순 배출했다. 물론 최고의 예는 스페이스X다. 반면에, 유럽에서 우주 스타트업을 시작한 인재들이 미국으로 떠나는 ‘두뇌 고갈’이 수십년간 계속됐다. 2030년까지 100개가 넘는 달 탐사 미션이 발표됐다. 하지만, 유럽이 이끄는 미션은 2개에 불과하다. 보고서는 “식탁에 앉지 못하면, 결국 메뉴에 오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HLAG의 멤버이자 이탈리아의 전(前) 대학ㆍ교육ㆍ연구부 장관인 스테파니아 지아니니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기자들에게 “유럽은 야망을 갖고 리더십을 확인하고 이 생태계에서 운전석에 앉을지, 지금처럼 구경꾼이자 주니어 파트너로 남을지, 이 보고서를 읽고 답을 스스로 찾아라”고 주문했다. 


다른 선진 우주국들, 자국판(版) ‘아폴로 효과’ 기대해
미국은 1960~1970년대 ‘아폴로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으로 20개 분야에서 40만 명의 과학자, 전문가들을 동원했다. 보고서는 “이것이 미래의 공공·민간 부문 간 공생적(共生的) 파트너십 형성으로 이어졌다”며 “우주 탐험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들도 미국 경제가 아폴로를 통해 기술적 진보를 이뤘듯이, 막대한 ‘아폴로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NASA는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2019~2020년 89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2021년에 201억 달러 어치의 총생산량을 내고 9만3000명의 고용 효과를 거뒀다고 밝힌 바 있다.


”아폴로 11호 지휘통제센터의 평균 나이는 28세” 
ESA 보고서는 또 “유럽이 우주 탐험에서 차기 이정표를 세우고 여기에 도달하려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전공자가 늘어나야 한다”며 “이는 젊은 층에게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과 주인 의식을 불어넣어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미국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아폴로 11호의 지휘통제센터의 평균 나이는 28세였다”며 “유럽은 젊은 층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보고서는 ESA가 로켓·위성을 비롯한 우주 장비를 조달하는 정책도 바꿔야 한다고 권고했다. 현재는 ‘지오-리턴(geo-return)’이라고 해서, ESA 회원국이 ESA 예산에 기여하는 비율에 따라, ESA가 그 나라에 우주 관련 일감을 주는 방식이다. 이는 소국(小國)들에게도 우주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유럽 차원에서 보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나눠먹기’식 산업 육성으로는, 선택과 집중의 경쟁력을 이길 수 없다. 아슈바허 ESA 국장은 “민간이 주도하는 뉴스페이스(New Space) 시대에는 새로운 게임과 새 룰이 적용되며, ESA는 이 게임의 승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인 1인당 연간 1.5유로인 우주 예산, 배로 증가”
보고서는 “우주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협업(collaboration)의 시대에서 협조·경쟁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환경에서, 미국과 중국은 특히 우주비행·탐험에 막대한 자금을 쏟으며 우주 탐험뿐 아니라 발사체 시장과 위성 시장까지 장악하고 있다. 두 나라의 우주 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면서, 유럽은 앞으로 ‘저궤도’라는 중요하고 제한된 자원에 접근하는 것조차 제한될 수 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대의 크리스 래플리 교수는 BBC 방송에 “독립적인 민간 우주기업을 육성하려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긴급히 육성(kick-start)해야 한다”며 “무대책으로 장차 치르게 될 비용은 지금 달라붙어 행동에 나서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일이 되게 하려면, 유럽인 1인당 연간 1.5유로(약 2100원)에 불과한 우주 예산을 배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유럽은 비전을 갖고, 다르게, 지금 행동해야 한다(Act visionary, differently, and now)”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