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택한 자의 용기-외로움
<우주인>의 배경이 우주인 이유!

아담 샌들러 주연, 넷플릭스 영화 <우주인>을 보고

“아저씨가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가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떠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소설 <보헤미아 우주인>이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체코계 미국인의 소설이다. 이 소설이 영화가 됐다.

 

기묘한 우주영화 <우주인 Spaceman>을 보았다. 기묘한 우주 먼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혼자 우주선을 타고 광활한 우주로 나갔다가 지구의 아내에게서 버림받고 극한의 외로움 속에서 외계생명체와 마주하고는 자신과 삶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얻고 대한민국 우주선에 구조돼 조국으로 돌아오는 체코 우주인 이야기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코미디언 아담 샌들러가 우주인으로 등장해 극도로 진지한 역할을 수행해 화제가 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우주영화라고 글을 써도 되는지 조금 망설여졌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황당한 평가들이 넘치는 현실이 나를 자극했다. 주로, 우주는 그냥 들러리이고, 인간의 외로움을 다룬 영화라는 식의 평가다. 우주공간은 낭비라고도 했다. 아, 외로움을 이야기하는데, 우주보다 더 적합한 곳이 어디 있다고! 우주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의 모든 구성이 무너져버릴 것이거늘! 우주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의 실물감은 한줌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거늘!

 

 

▶궁극의 외로움, 우주보다 더 절실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외로움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의 초입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던진다. 그럴만큼 인간의 심성에 관한 연구이다. 그래서 우주가 아니어도 충분히 탐구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도대체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한 시간에 3만km씩 지구로부터,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멀어져가는 상황보다 더 황당한, 더 외로운 상황을 상정할 수 있을까.


인간이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왜 굳이 우주라는 공간을 써야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극한의 외로움, 절대적 외로움의 공간이 우주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렇다.

 

아폴로11호에 올라탄 사람들부터, 아니 그 훨씬 전 쥘 베른의 소설 <달나라여행> 때부터, 현재의 최고참 여성 우주비행사가 “화성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가겠다, 설령 못돌아올지라도...”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우주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그에 맞서는 용기는 무엇으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들은 모두 죽음과 미션을 같은 쪽에 놓고 선택한다. 닐 암스트롱은 우주선 훈련 중 추락사고도 겪는다. 그래도 아폴로11호를 탔다. 쥘 베른 소설 속 인류 첫 우주비행사들은 돌아올 방법에 대해 미처 생각도 못하고 출발해 버린다.

 

사람은 외롭다. 내가 좋아하는 마라톤도 외로운 운동이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은 우주에 나선 우주인들에 비한다면, 어린애 투정에 불과하다.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인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 <마션>의 주인공이 겪었을 매 순간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껴 보았는가. 그때도 왜 굳이 화성이었냐고 물었겠지? 과학적 타당성이 있느니 없느니, 굳이 화성을 배경으로 할 필요가 있느니 없느니... 영화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독한 상황을 상정한 것이다. 영화 <패신저스>에서 우주비행 도중 홀로 깨어난 사람의 절대적 외로움에는 혹시 공감하나?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그러할진대....

 

우주를 선택하고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나고, 한줄기 생명의 줄이라고 생각한 것이 끊기는 경험을 통해 완벽히 차단된 자의 위태로움보다 더한 외로움을 어찌 상정한다는 말인가. 일상 속의 어떠한 외로움이 그 극단적 외로움에 견줄 수 있을까.

 

그곳이 우주여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우주가 어떤 곳인지, 아무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지상의 관제탑과의 연결이 끊겼을 때, 지상의 가족에게 버려졌을 때, 그 극단적 ‘진짜로 혼자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이다.

 

 

▶우주를 선택한 용감한 자들의 외로움

이 영화에는 액션이 없다. 그러나, 용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 살아보고자 하는 용기. 설령 못돌아오더라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것들을 하는 용기. 혼자 남더라도 끝까지 살아보겠다고 의지를 다지는 용기. 처음 보는 외계 생명체와 한몸이 되는 용기. 결국 남은 유대감을 위해 광활한 우주로 뛰어드는 용기.

 

왜 우주가 배경으로 필요했는가에 대한 답에는 용기도 있다. 그런 용기와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정신과 도전정신이 있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모든 발전에는 이같은 극단적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런 용기를 지닌 영웅적 인간들조차도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영웅의 비극’을 이야기할 때, 용맹한 전사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 결함을 상정한다. 그 결함으로 인해, 그 영웅은 매우 인간적으로 보이고, 그의 불가피한 몰락은 평범하고 야비한 자들의 키득거림으로 끝나게 된다. 현대사회는 그 수준을 넘어선 ‘시민’의 탄생을 동반하지만, 여전히 그 시민의 영역에 들 수 없는 자들은 넘쳐나는 법이고...

 

그래서 그 외로움은 더욱 크다. 엄청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이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 희생적으로 도전에 나섰으나 그들의 배신과도 같은 버림에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고로 예수로부터 수많은 영웅호걸들까지, ‘고향에서 홀대받기’는 배신의 인간들에게 유구한 전통과도 같은 것이니...

 

왜 우주가 이 영화의 배경이었는지 모르겠다고? 용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영웅적 용기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없는 용기를 지닌 자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용감한 자가 자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과 그래서 더욱 극렬한 고통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이 상황의 설정 자체가 용기 위에 있고, 마지막 행동, 외계생명체를 살리기 위해 우주공간으로 뛰어드는 것 또한 이 ‘깡마른 인간’이 사실은 대단히 용감한 사람임을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외계생명체라는 해법이 타당한 공간은 오직 우주다

왜 우주여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또다른 대답은, 외계생명체의 등장이다. 신을 믿든 믿지않든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신이다. 이 영화 <우주인>에서 외계생명체의 뜬금없는 등장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장치이다.

 

외계생명체가 있다고 믿는가? 그 존재는 우리 인간의 이성과 문명을 넘어선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 존재는 신과 무엇이 다른가. 외계생명체가 없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심성, 인간의 가치,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런 존재로 외계생명체를 등장시켰다. 인간이거나, 사물이거나, 신일 수 있는 존재의 종합적 상징체이다.

 

이 거미와 유인원 복합체처럼 생긴 외계생명체를 폴 다노라는 배우가 목소리 연기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같은 존재가 상정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존재의 사실성이 가장 그럴듯하게 서포트되는 공간은 우주다. 가령,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이런 존재를 만났다고 썼다면, 사람들이 그럴듯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모와 이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구성했다면, 또 얼마나 신파라고 놀려댈까. 비슷한 외로움이지만, 비슷한 용기이지만, 비슷한 위로지만, 그럴듯함에서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여야, 그 외로움의 진지함을, 그 용기의 지극함을, 그 외계생명체의 그럴듯함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냥 이런 영화가 싫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연기는 좋은데, 상황은 나쁘다? 바로 그 상황을 가장 그럴 듯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연기가 좋은 것이다.

 

영화 <더문>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해 우주와 우주인을 구현해 냈는지 아는 사람들은 "더문은 신파"라고 놀려대는 평을 읽을 때, 느꼈던 문화적 절망감을 이 영화 <우주인>을 우습게 던져버리는 평자들의 글을 보면서 또다시 느낀다.

 

휴, 누가 뭐라든, <우주인>은 우주라는 공간을 상정해야 실감할 수 있는 무한한 외로움과 용기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