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타임즈는 2025년을 맞아 [주말칼럼]란을 신설, 'SF읽기'와 '우주시대 건강법' 등을 게재한다. 'SF읽기'를 쓰는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 우주시대의 씨앗을 뿌린 SF명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해온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의 SF명작 읽기'를 개편해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는 칼럼코너를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SF 작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재미이자 의의 중 가장 큰 것은 새로운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우리를, 우리의 사회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클래식의 지위에 오른 작품들의 경우, 이 ‘현실의 인간과 인간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반영했는가’에 집중한 작품이 많다.
반면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멋지게 그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도 있다. 왜 굳이 현실세계 이야기를 하려고 힘들게 SF세계를 창조하지? 이렇게 물으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도 있다. 그 대표선수가 거장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다. 깁슨은 걸작 <뉴로맨서>(1984)에서 우리에게 ‘사이버스페이스’ 개념을 소개하며 지금까지도 지배적인 서브 컬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창시해냈다. 휴고상을 비롯한 주요 SF 시상식을 휩쓸었으며 아직까지도 SF사상 가장 혁명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타락한 2100년대의 런던은 '영광스럽던 과거'를 조종해 식민지로 삼으려는 시도를 한다. / imdb.com
미래와 현재, 과거 교직된 <페리퍼럴>의 세계관
그리고 2022년 아마존 프라임에서 시리즈로 제작된 깁슨의 2014년 작품 <페리퍼럴(The Peripheral)>은 이 사이버스페이스의 개념을 현실의, 그러나 다른 시공간의 ‘실제 세계’를 대상으로 확장했다.
2030년대 미국 시골, 그리고 2100년대 영국 런던이라는 독특한 두 개의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플린 피셔는 미국 시골에서 3D 프린팅 작업장에서 일하며, 종종 용돈벌이로 군 복무를 마친 오빠 버튼과 함께 돈은 많고 시간은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가상현실 비디오 게임 레벨업을 해주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버튼은 누가봐도 수상쩍은 고액의 게임 베타테스트 용역을 맡게 된다. 간단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드론을 이용해 특정 건물을 감시하기만 하면 된다. 버튼은 플린에게 이 일을 맡기고 플린은 이 가상세계에 접속한다. 놀랄만큼 사실적인 게임 속 모습에 감탄을 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플린은 곧 한 여인이 살해당하는 모습과 범인을 보게 된다.
플린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 2100년 미래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 미래는 '잭팟(The Jackpot)'이라고 불리는 환경 붕괴, 전염병, 경제 불평등 등의 연쇄적 사건들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한 세상이다. 이 미래에는 특정 시점의 ‘과거’와 양자기술을 통해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막 발견되었다. 이 과거는 미래와 연결되는 순간 새로운 시간의 분기를 형성, 그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시간여행을 다룬 모든 작품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시간여행의 딜레마를 피해가는 아주 영리한 장치다).
이렇게 미래와 연결된, 그러나 그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과거의 시점은 '스텁(Stub, 한글판 소설에서는 '그루터기'로 번역)'이라 불렸고, 미래의 엘리트들은 이곳에 접속하여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현실의 실제 존재하는, 하지만 다른 세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심즈’와 같은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것이다.
플린과 버튼은 이 미래 타임라인 속에서 벌어진 살인을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살인 사건의 목격자인 플린을 죽이려고 하는 미래의 위협에 맞서, 미래의 홍보 전문가 윌프 네더튼, 부유한 후원자 레프 주보프는 플린의 동맹을 결성하는데. 과연 플린은 미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세계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산다, 그것이 중요하다
<페리퍼럴>은 ‘과거’를 식민지화한다는 충격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과거의 인간을 ‘페리퍼럴’이라 불리는 원격조종 로봇 안으로 불러들여와 자신들이 직접할 수 없는 일들을 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다른 세계를 선보인 깁슨의 장기가 과거의 현실 세계로 뻗어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스텁'이라는 설정을 통해 다른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냈다. 깁슨의 창작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저마다 고유한 연속성을 띤 시공간으로 존재하는 개별 우주’를 의미하는 연속체 개념이 사용되었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다뤄 우리에게도 익숙한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인 다중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의도적으로 생성할 수 있고, 연결과 동시에 세계선이 분리되어 인과관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으며, 정보의 상호교환이 가능할 수 있다는 설정을 더했다.
또한 물리적 시간여행이 아닌 정보의 전달만이 가능하다는 설정 때문에 직접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을, 인간과 외적으로 흡사한 페리퍼럴이라 불리는 원격조종 로봇이라는 또다른 멋진 기술적 설정을 통해 장점으로 승화시킨 재치가 돋보인다.
<페리퍼럴>의 또 다른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세계 멸망의 원인인 '잭팟'. 많은 SF 작품들이 세계 멸망을 다루었지만 대부분 단일한 재앙 사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단순하다. 하지만 <페리퍼럴>의 세계의 '잭팟'은 일련의 글로벌 재앙의 연속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인류 80%를 집어삼켰다. 현재 진행형인 세계 위기들을 반영하여 훨씬 더 설득력있는 세계 멸망 시나리오를 그려낸 것이다.
2022년 아마존 프라임에서 스콧 B. 스미스 감독이 깁슨의 이 대작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했다. 클로이 모레츠가 주연인 플린 피셔 역을 맡은 드라마 <페리퍼럴>은 탄탄한 세계관과 설정, 원작보다 강화된 스릴과 액션, 원작자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세련된 시각효과를 통해 전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특히 평화롭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2030년의 미국 시골마을의 모습과, 황폐해졌음에도 기술과 엄청난 부에 힘입은 2100년대 런던의 화려한 모습의 대조, 그리고 원작보다 훨씬 화려한 하이테크 전투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페리퍼럴>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래인들은 과거인 '스텁'에 집착하며 관여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주인공 플린 피셔를 비롯한 스텁의 사람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현재 자신과 가족의 안녕이라는 점.
세대 갈등이 극에 달해 폭발 직전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극 중에는 과거를 미화하는, 어찌보면 낭만주의자들이며 어찌보면 보수주의자들인 미래인들이 등장한다. 영광스러웠던 지난 날과 비교하여 타락한 현재를 혐오하는 사람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인도, 미래인도 마찬가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리라.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