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칼럼 SF읽기] 30일의 밤:
지금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가 본 크라우치 소설과 Apple TV+ 드라마

※ [주말칼럼 SF읽기]를 쓰는 최기욱 변호사는 SF 열혈팬. 우주시대의 씨앗을 뿌린 SF명작들을 영상 리메이크 작품과 비교해 소개해온 '엔지니어 출신 변호사의 SF명작 읽기'를 개편해 우주문화의 공감대를 넓히는 칼럼코너로 마련했다. 이 글은 코스모스 타임즈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국내외 정세가 급격히 소용돌이치면서 필자를 비롯해 하필 그 직전에 주식 투자를 결심한 사람들에게 많은 절망을 안겨주고 있는 요즘이다. 그 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날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그 선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그 때 다른 선택을 한 삶을 내가 누려볼 수 있다면? 그런데, 그러한 삶 속에서 내가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한 걸작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30일의 밤(원제 'Dark Matter')>을 소개한다.

 

평생세계들에 살고 있는 제이슨은 과연 같은 사람일까? / appleTV+

 

▶제이슨, 그리고 제이슨

<30일의 밤>은 물리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제이슨 디센(Jason Dessen)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제이슨은 어느 날 저녁, 납치되어 정체불명의 실험실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깨어나 자신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평행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계에서 그는 가족은 없지만, 과학자로서 대성공을 거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성공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이슨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평행세계들 사이를 여행하게 되며, 각기 다른 '선택의 결과'들이 만들어낸 세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또 다른 제이슨,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온 바로 그가 원래의 삶을 훔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나쁜 제이슨에게 납치당한 이후의 자신의 무수한 선택 덕분에 생겨난 다른 무한한 우주의, 다른 무한한 제이슨들 역시 자신의 삶을 되찾으러 이 세계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건 내 삶인데!

 

진짜 제이슨은 다시 사랑하는 아내 다니엘라(Daniela)와 아들 찰리(Charlie)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수한 '자신'들과 싸우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진짜 제이슨'이 맞는 것일까?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양자세계'를 도입했다. / appleTV+

 

▶다중우주와 선택의 문제

<30일의 밤>은 하드SF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을 대중적이고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과학적 개념에 대한 충실한 설명과 인간 내면의 갈등을 동시에 탐구했다. 특히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을 질문을 물리학적으로 극단까지 밀어붙이며 철학적 사유를 유도한다.

 

작품은 기술적 디테일에 집착하기보다 과학적 아이디어를 인간적인 갈등과 연결시키는 데 집중한다. 복잡한 과학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속에 녹여냈으며, 정체성과 자아에 대한 철학적 고찰도 놓치지 않았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이후의 멀티버스를 테마로 한 다양한 매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양자세계'라는 과학적 테마를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무수히 많은 방문들이 있는 무한한 복도는 다중우주의 세계를 보여준다. / youtube

 

▶애플티비의 영상화

이 작품은 2024년 Apple TV+에서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의 핵심 주제인 다중우주와 정체성, 선택의 결과를 유지하면서도, 영상 매체의 특성을 살려 여러 부분에서 변화를 주었다.

 

드라마는 원작 소설의 철학적 질문인 "당신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가?"를 중심으로, 시청자가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강화하였다. 또한, 다중우주라는 복잡한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중우주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인 ‘박스’ 내부에서 펼쳐진 다중우주의 세계는 무한한 복도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시각적 황홀경 그 자체이다!), 시청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블레이크 크라우치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여 원작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드라마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하였다(또 가족 구성의 추가되고, 일부 장면의 과학적 정확성이 보완되었다). SF작품 팬들에게 굉장히 드문 찬사인 ‘원작 팬과 새로운 시청자 모두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결과’라 할만한 멋진 영상화라 할 수 있다.

 

또다른 삶, 혹은 지금의 삶에 비극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지난 날의 선택을 딛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 appleTV+

 

▶그래서… 삶에 만족하십니까?

‘나쁜 제이슨’은 가족보다 일과 선택한 자신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쁜 제이슨의 입장에서) 비극 그 자체일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나쁜 선택이라 생각하며 후회하는 것은 돌아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삶, 다른 사람, 다른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멋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다른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면서 내가 살아오며 해온 모든 선택을 버리고자 하는 선택이기에. 결국 지난 날의 선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은 어쩌면 최고의 조언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힘든 삶을 버텨내보자, 심란한 개미들이여!

 

“너무나 많은 버전의 당신을 봤어. 나와 함께한 당신, 함께하지 않은 당신. 미술가, 교사, 그래픽디자이너. 하지만 결국엔 모두가 그저 삶일 뿐이야. 우리는 그 삶을 거시적으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바라보지만, 우리가 그 삶 속에 있을 때는 그저 하루하루의 일상일 뿐이잖아? 그리고 그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다툼 없이 잘 지내야 할 대상이지 않을까?”

 


최기욱 변호사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플랜트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엔지니어 및 리스크매니저로 근무했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문과와 이과,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배경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재직 중이며 작가, 강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비바! 로스쿨>(박영사. 2022), <엘리트문과를 위한 과학상식>(박영사. 2022), <잘 나가는 이공계 직장인들을 위한 법률계약 상식>(박영사. 2023), <법무취업길라잡이>(박영사, 2024), <웃게 하소서>(바른북스, 2024) 등이 있다.